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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뉴스][대선후보 검증③ 정세균] 정세균의 삶과 정치 [2]

정세균의원 (skchun****)

주소복사 조회 42 11.06.09 14:16

 

 








[대선후보 검증③ 정세균] 정세균의 삶과 정치
차근차근 밟아 온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길









민주당 정세균 최고위원의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 시절 모습.
修身, 진짜 촌놈의 꿈

한국전쟁이 발발했던 1950년 가을, 정세균은 오지 중의 오지로 알려진 전북 장수에서 7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정세균과 가까운 친구들이 그의 이름 앞에 ‘진촌’이라는 별호를 붙여 주었는데 그 뜻이 바로 진짜 촌놈이라고 한다. 어린 시절 16km를 걸어 학교를 다녀야 했고 틈만 나면 산에 가서 지게로 나무를 해야 했다. 그때 청정산골에서 기른 체력 덕분에 어른이 되어서도 특별히 건강관리를 하지 않지만 체력에는 자신이 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집안 형편이 넉넉치 못했지만 몰락한 양반 집안으로 정치에도 몸담았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정치인이 되겠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아침 등굣길에 우연히 보게 된 동네 담벼락에 붙어있던 국회의원 선거 포스터를 보고 이 다음에 나도 커서 국회의원이 되어, 포스터에 멋있게 나와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꿈은 꾸었지만 현실은 너무나 달랐다. 초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중학교에 진학할 형편이 되지 못해 1년 동안 산에 가서 나무를 하고 보내다가 이듬해가 되어 고등공민학교를 가서 2년이 채 안되어 검정고시로 중학과정 수료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공민학교를 마치고 다시 한 해 동안 나뭇짐을 지다가 인근 무주에 있는 안성고를 들어갔고 다시 6개월 만에 전주에 있는 공업고등학교에 응시하여 합격한다. 그 후 다시 더 넓은 세계를 만나고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인문계로 옮겨야겠다고 생각하고 신흥고를 찾아가 교장선생에게 사정을 말하고 학비를 면제받고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교내 매점에서 빵을 파는 일자리를 얻게 되었고 열심히 공부하여 3학년 때는 전액 장학금을 받았고 전교회장에도 선출되었는데 자신의 첫 번째 선출직으로 자랑스럽게 기억하고 있다.

1971년 고려대 법대에 진학하여 사법고시에 뜻을 두었으나 이듬해 10월유신이 일어나고 유신헌법이 선포되고 당시 고대에서 헌법을 가르치던 한동섭 교수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고심 끝에 법관의 길을 접게 되었다고 한다. 고시공부를 그만 두고 유신에 반대하는 학생들과 어울렸고 고대신문사 일에 열중했는데 1974년 총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당시 캐치프레이즈가 “친진보 탈보수”였지만 진보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정확히 알기보다는 정권에 저항한다는 뉘앙스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1974년은 박정희 유신독재가 긴급조치 1호를 선포하여 시인 김지하가 <1974년 1월>이란 시에서 “1974년 1월 죽음이라 부르자 오후의 거리, 방송을 듣고 사라지던 네 눈 속의 빛을 죽음이라 부르자”고 했던 우리 역사에서 가장 암울했던 한 시기였기에 대학의 학생회장이라 하더라도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활동을 적극 펼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무렵 많은 대학생들이 연행되거나 구속되었고 데모도 끊이지 않아 학생회도 투쟁방향을 놓고 고민이 많았을 것은 자명하다. 정세균은 이 당시 ‘바위에 부딪쳐 깨지는 달걀이 되느니, 차돌이 되어 저 바위를 깨리라’ 스스로 다짐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감옥에서 고생하는 친구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후일 정치에 입문하면서도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사람들에게 빚지고 있다는 마음을 솔직히 토로하고 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마친 다음 진로를 고민하다가 종합무역상사의 하나인 주식회사 쌍용에 입사한다. 쌍용에 입사해서 첫 봉급을 받고는 기쁜 마음 한 구석에 정치의 꿈과 멀어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컸다고 한다. 몇 달을 고민한 끝에 자신이 장학금에 의존하여 학창시절을 보냈던 기억을 하며 고향 아이들에게 장학금을 주겠다는 생각을 하고 실행에 옮겼다. 이 장학회는 지금까지 꾸준히 이어져 매년 50여 명의 학생을 지원하게 되었다.

齊家, 더 넓은 세계로









(ⓒ폴리뉴스)
정세균은 쌍용에 입사한 이듬해인 1978년에 경북 영일군 출신인 아내와 가정을 이룬다.

당시 한국의 종합무역상사는 ‘에스키모에게도 냉장고’를 판다고 할 정도로 치열하게 세계시장을 향해 뻗어나가던 시기였고 정세균도 입사 후 시멘트에서 시작하여 기계부품, 신발 등 여러 품목을 영업하며 외화를 벌어들이는 수출역군이라는 사명감으로 국제영업 최일선을 뛰어다녔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낸 뒤 1982년 미국으로 발령이 나서 1990년까지 9년 동안 해외지사 생활을 하게 되었다.

전두환의 5공화국 시절과 87년 6월항쟁의 시기를 미국에서 보내면서 마음 한편에서는 마치 자신이 도피해서 사는 것 같은 불편함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얻는 희열도 있었고 보람도 있었다. 또한 이 과정에서 첫해를 빼고는 계속해서 학업을 이어갔는데 회사에서도 장려를 해주었다고 한다. 뉴욕에 근무할 때는 뉴욕대학에서 공공행정을 전공했고 나중에 LA로 옮겨서는 페퍼다인 대학에서 경영학 석사(MBA)코스를 마쳤고 귀국한 이후에 경희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도 취득했다.

정세균은 10년 가까운 미국생활을 통해 미국의 정치와 생생한 실물경제를 배울 수 있었고 무엇보다 편견이 없는 합리적 사고를 가질 수 있었다고 자부한다.

1990년 귀국 이후에 쌍용에서 임원으로 승진하여 근무하던 중 1994년 통합선거법이 제정되어 선거공영제를 도입해서 돈 안 드는 선거를 할 수 있다는 보도를 접하고 이듬해 출마를 결심하고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제출했다. 당시 쌍용의 김석원 회장은 “정치가 좋아 굳이 가겠다면 사장까지 하고 나가면 좋지 않겠느냐?”고 제안했지만 “자기 분야에서 재능이 고갈되고 난 다음에 국회에 가면 안 된다. 한창 일할 때 국회에 가는 게 맞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당시 정치상황은 민주화가 되었다고 하지만 전두환, 노태우 정권에 이어 3당합당으로 민정당 세력에 합류한 김영삼 대통령이 문민정부를 이끌고 있었고 그와 경쟁관계에 있었던 김대중은 정계은퇴 이후 영국에 체류하는 상황이었다. 1995년 6월 지방선거를 계기로 김대중은 정계에 복귀하고 곧이어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으며 정세균은 이 과정에서 김대중 총재와 함께 하게 되었다.

治國의 道, 국회와 정부에서의 경험









▲ 故 노무현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故 김대중 대통령과 문상을 하는 정세균 대표.
1996년 15대 총선에서 정세균은 고향마을에서 어린 시절의 꿈이었던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97년 대선을 앞둔 시기였기에 의정활동과 더불어 1996년 9월부터 김대중 후보의 청년조직인 연청 중앙회장을 맡아 본격적인 선거준비에 착수한다.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승리하고 새정치국민회의는 집권당이 되었고 정세균은 IMF 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위원회의 간사와 상무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IMF의 요구로 각서를 제출한 상황에서 노사정위원회는 기업의 구조 개선과 더불어 노동 유연성을 높이기 위한 구조조정에 합의를 도출해야 했다.

하루 아침에 일자리를 잃고 거리로 내몰려야 하는 노동계를 설득하는 일이 쉬울 리 없다. 결국 2월말에 가서야 합의문에 서명했지만 지금도 비정규직이 양산되는 단초가 되었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이 노사정 합의이다. 1998년 여름에는 현대자동차에서 2,700명에 달하는 대규모 정리해고가 예정되었고 이 과정에서 노사 간에 격렬한 충돌이 벌어졌다. 당에서 합동중재단이 꾸려졌고 당시 노무현 부총재가 단장을 맡았고 정세균 의원도 그 일원으로 울산에 내려가게 되었다. 일촉즉발의 위기 속에서 노사 양쪽을 설득한 결과 해고 규모를 대폭 축소하는 선에서 합의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기업 측에서는 정치권이 개입하여 구조조정을 무력화했다고 비난했고 노동계에서는 정리해고의 물꼬를 터주었다고 몰아붙였다.

정세균 의원 본인은 이 당시 경험이 기업의 입장에서 경제를 보는데서 벗어나 경제 전체를 정치의 입장에서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결국 시장의 자유도 사회정의의 토양 위에서 꽃피울 수 있는 것이고 정치가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고 배분적 정의를 실현하는 일을 맡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는 것이다.

2000년 총선에서 재선에 성공한 정세균 의원은 비교적 순탄하게 국회와 당내에서 경제통으로 불리면서 착실히 의정활동을 펼쳤다.

초선시절부터 교수, 각계 전문가들과 공부모임을 지속적으로 가져왔고 이를 통해 정책 전문성도 높이는 한편, 바깥에서 보는 정치에 대해서 듣는 기회도 가졌다는 것이다.

2002년에는 지방선거에 전북지사로 출마하기 위해 당내경선에 나섰으나 강현욱 의원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그런 다음 당시 노무현 후보의 권유로 노무현 후보 정책실장을 맡아 당선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렇지만 평소 노무현 후보와 궁합이 잘 맞았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노무현 후보는 호방하고 직선적이지만 정세균 의원은 온건하고 합리적이라는 평이었고 노무현 후보가 노동계와 가깝다면 정세균은 기업가 출신이라는 점에서도 차이가 났다. 그러나 당이 국민경선을 통해 선출한 후보였기 때문에 당선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은 당연한 책무로 받아들였다. 당시 정세균 의원은 정균환 의원이 이끄는 ‘중도개혁포럼’의 회원이었는데 노무현 후보의 지지도가 급락하면서 소위 ‘중개포’에서는 후보교체론을 거론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정세균 의원은 원칙을 지켰고 중개포와 결별하면서 끝까지 후보와 함께했던 것을 지금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승리를 거두고 정세균 의원도 2004년 총선에 당선되어 3선의원이 되면서 당내에서 역할과 입지가 확연히 달라지게 되었다.

성취와 좌절

정세균 의원은 2002년 대선 이후 새천년민주당의 정책위의장으로 집권당의 정책을 총괄하는 책임을 맡게 되었다. 2003년에는 새천년민주당에서 신구주류가 격렬하게 충돌하였고 결국 분당사태에 이르게 되었다. 정세균 의원도 결국 열린우리당을 선택했지만 당시 천정배, 신기남, 정동영 의원처럼 이를 선도하던 입장은 아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4년에는 총선 이후 17대 국회에서 국회 예산결산특위 위원장을 맡아 예산안 처리를 진두지휘하게 되었다. 2005년 1월에는 열린우리당의 원내대표로 선출되어 국회에서 여당을 진두지휘하는 책임을 맡았다.

원내대표를 맡아 이라크 파병연장안을 처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국회 안팎에서 따가운 시선과 비난을 받아야 했다고 한다. 하지만 17대 국회에서 최대 난관이었던 4대 개혁입법은 국가보안법을 제외하고 모두 통과시켰고 정부가 요구했던 입법안도 거의 모두 통과시켰다. 물론 다수당의 의석이 뒷받침되기도 했지만 야당과도 최대한 타협했기 때문에 이룬 성과였다. 특히 행정수도가 헌재에서 위헌 판결이 난 이후 행정중심복합도시법을 통과시키는 과정은 간단치 않았고 많은 논란 끝에 가까스로 처리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일부 법안에 대해서는 ‘누더기 입법’이라고 매도당하기까지 했다. 4대 개혁입법의 하나인 과거사법의 경우 한나라당이 주장하는 부분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심하게 공격당했지만 훗날 당사자로부터 법안을 처리해 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듣기도 했다고 한다.

2005년 10월 26일 재보선에 열린우리당이 4 대 0으로 참패하자 이에 책임을 지고 문희상 당시 당의장이 사퇴하고 정세균 원내대표가 당의장 권한대행을 겸하게 되었다. 이후 정세균 체제는 빠른 속도로 당을 안정시키면서 사립학교법도 통과시키고 중앙위원회 당헌 당규도 개정하여 전당대회를 준비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점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정세균 당의장에게 산업자원부 장관으로 입각제의를 했고 정세균은 이를 수락했다. 그렇지만 당내외에서 여러 논란이 빚어졌고 결국 임기를 불과 한 달 남겨두고 당의장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미 정동영, 김근태 두 전 지도부가 장관직에 나가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정세균 당의장이 “뜻은 고맙지만 전당대회까지는 당을 안정시키는 데 전력하겠다”고 했다면 주변의 평가가 달랐을 것이란 말들이 많았다.

어쨌든 정세균 의원은 2006년 2월부터 산업자원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에너지와 자원개발을 위해 세계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또한 산자부 장관 시절에 우리 경제의 미래를 위해 ‘양적 성장’을 추구하던 시대에서 ‘질 좋은 성장’과 ‘상생경제’를 추구하는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는 화두를 던졌고 이는 지금도 정세균의 경제 정책으로 살아 있다.

2007년 1월 장관직을 마치고 당에 복귀하여 다시 당의장직에 올랐다. 이 무렵의 열린우리당은 이미 독자적으로는 대선을 치르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 접어들고 있었다. 위기에 직면한 열린우리당을 수습하고 범여권을 통합시킬 적임자로 정세균 의원이 다시 발탁된 것이었다. 열린우리당에서 역할했지만 구민주당 측에서도 반감이 그리 크지 않았고 당시 탈당파들이나 당 사수파 모두 정세균과 함께 하길 원했다고 한다. 결국 여권의 지지율이 바닥을 헤매는 상황에서 민주개혁진영의 통합만이 유일한 활로라는 인식은 공유되었고, 일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2007년 8월 대통합민주신당이 만들어지면서 열린우리당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정치 일선에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민에게 감동을 줄 수 없었던 통합은 대선에서의 참담한 패배로 이어졌고 민주정부 10년은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에 의해 잃어버린 세월로 매도당하게 되었다.

平天下의 길, 열릴 수 있을까?









▲ 6.2 지방선거 승리의 기쁨을 나누고 있는 송영길 인천시장 당선자와 정세균 대표.
정세균은 2008년 7월 다시 민주당 대표직에 오르게 되었다. 거대여당에 맞서 야당의 존재감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민주정부 10년 동안 양극화가 심화되고 지지세력이 분열되었으며 한번 떠난 민심은 좀체 돌아오지 않았다. 2007년 대선의 패배가 너무나 충격적이고 뒤이은 총선에서도 참담한 패배를 당했기 때문에 민주당이 제자리를 찾기는 쉽지 않아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당 대표직에 오른 정세균은 2008년 9월 이명박 대통령과 여야 영수회담을 가졌다. 당시 정세균 대표는 외교 안보는 협력하고 경제는 조언하며 사회분야는 비판하겠다는 입장을 내세우며 합리적인 여야관계를 모색했지만 결국 이명박 대통령에게 당했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정세균 대표는 세계 경제위기 상황을 고려하여 경제살리기에는 초당적으로 협력하겠다는 약속을 했는데 당내에서는 한나라당이 ‘협력’만을 강조할 경우 정기국회에서 대여투쟁이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면서 정대표의 ‘野성 결여’를 비판한 것이다. 대화와 타협을 중시하는 정세균의 정치철학이 이명박 정부의 일방통행에 가로막혔고 야당내의 원칙주의자들에게도 공격을 당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의 실정이 거듭되면서 차츰 국민들 속에 반MB정서가 자리를 잡아 갔고 그 결과 2009년 4월 29일과 10월 28일 두 차례의 재보선에서는 민주당 등 야권이 승리를 거두었고 2010년 6.2 지방선거에서도 민주당 등 야권은 큰 성과를 거두며 승리했다.

이러한 승리를 바탕으로 정세균 대표는 당내에서의 입지를 굳건히 하고 차기 대권주자로 위상을 잡으려 했지만 좀처럼 국민 지지도는 오르지 않았다.

2009년 4월 재보선에서 정동영 의원의 전주 출마를 끝까지 막은 것에 대해서는 지금도 엇갈린 평가들이 있다.

그렇지만 이 과정에서 두 사람 모두가 상처를 입었다는 분석이 객관적일 것으로 보인다.

정세균 대표에게 다시 찾아온 가장 중요한 고비 중 하나는 2009년 7월 국회에서 한나라당이 언론관계법을 날치기 처리를 한 것이었다. 그동안 극한투쟁을 찬성하지 않았던 정세균 대표도 이때만은 단식에 돌입했고 결국 한나라당이 강행처리하자 의원직을 사퇴하기에 이르렀다. 이 같은 투쟁들의 결과가 축적되어 재보선과 지방선거 승리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2010년 6.2 지방선거 승리 이후 실시된 7.28 재보선이었다. 정세균 대표는 이 재보선에서 실패함으로써 명분도 실리도 모두 잃고 결국 당 대표직에서마저 물러나게 되었다. 이 무렵 정세균 대표 측근들은 6.2 지방선거 승리에 고무되어 7.28 재보선에서도 낙승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사태의 반전을 노리던 한나라당은 철저하게 인물중심 선거전략을 짰고 정권심판론보다 인물론이 먹히는 재보선의 특성으로 인해 민주당은 패배하고 말았다. 은평을과 인천 계양 등은 민주당 입장에서는 너무나 아쉬운 패배였다 할 것이다. 7.28 재보선이야말로 정세균 정치의 가장 중요한 승부처일 수 있었지만 안이한 판단으로 실기한 것이었다. 이는 이후 2011년 4.27 재보선에서 손학규 대표가 승부수를 던져 일거에 야권 제1주자로 도약하는 것과 대비되는 대목이다.

2010년 10월 3일 민주당 전당대회는 정세균 전 대표가 친노진영의 지원을 받으며 선전했지만 3위에 머무르고 말았다. 이미 민주당의 대의원들은 한나라당 박근혜에 대항할 수 있는 차기 대권 주자를 뽑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당시까지 정세균 대표는 당을 관리할 적임자란 평가는 있었지만 차기 대권주자로는 당내에서조차 인식되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손학규, 정동영에게 밀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011년에 접어들면서 정세균 최고위원은 자신의 대선가도를 함께할 싱크탱크로 ‘국민시대’를 출범시켰다. 초선의원 시절부터 공부모임을 꾸준히 해왔다는 것을 입증하듯이 면면들이 쟁쟁하다. 그리고 5월에 접어들면서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에 대해 직격탄을 날리면서 차기 대권 주자 반열에 서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아울러 이명박 정부의 대기업과 부자 우선의 낙수경제론에 대비되는 분수경제론을 제시하면서 중소기업과 자영업자 그리고 서민을 위한 경제를 역설하고 있다. 또한 5월 18일에는 광주에서 출발하여 5월 23일 김해 봉하마을에 이르기까지 민주성지 순례 행군을 감행하면서 남부민주벨트론을 역설했다. 광주민중항쟁과 부마항쟁의 정신을 되살리고 김대중, 노무현 두 지도자의 뜻을 계승하지는 것이며 손학규 대표의 중부 수도권 벨트에 대비되는 민주 정통성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정세균 최고위원은 지난 2010년 10월 3일 전당대회에서도 ‘판을 키우자’고 자중한 바 있고 지금도 ‘스타 프로젝트’를 강조하며 야권 내의 여러 잠룡들이 모두 경쟁에 뛰어들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이렇게 국민의 주목을 끌 수 있는 판이 벌어져야 그 속에서 승리한 사람이 본선 경쟁력을 가지고 여권 후보에 맞설 수 있다는 것이다.

부산, 경남에서 문재인, 김두관 등이 내년 대선경쟁에 나설 것을 권유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결국 범야권이 하나의 큰 판에서 룰을 정해 경쟁하고 그 결과에 승복한다면 그것이 최상의 경선이 될 수 있다는 것이고 자신에게도 기회가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 2010년 10월 3일 당 지도부 선출 전당대회에 출마하며 기자회견 하는 모습.
정세균 최고위원은 이제까지 당을 이끌면서 자신을 내세우기보다 당을 앞세우는 선당후사 정신을 견지했다고 한다. 그러나 야당의 지도자는 스스로 국민의 지지를 높임으로 해서 당에 대한 지지도를 끌어 올려온 것이 사실이다. 물론 최근 민주당의 지지도가 30%대를 회복했지만 야권의 차기 주자 그 누구도 20%대에 육박하는 지지도를 얻지 못하는 상황을 감안한다면 아직은 시기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온건 합리적이고 현실주의자라 할 수 있는 정세균 최고위원이 2012년 대선까지 남은 기간 동안 국민 속에 시대를 이끌어 갈 리더십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민주당은 앞으로 야권연대냐 통합이냐를 결단해야 할 시기가 다가올 것이고 이 과정에서 범야권의 세력재편은 필연적으로 수반될 것이다. 정세균 최고위원은 스스로 김대중과 노무현 정신을 가장 잘 계승하고 있는 민주당의 정통성을 가진 적자란 입장이다. 김대중 대통령을 직접 계승한 사람이 차기 대선 주자군에 없고 친노 진영에서는 유시민이 지금까지 국민참여당에 있는 상황에서 정세균 최고위원이 양쪽을 아우를 수 있는 주자로 부각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호남, 영남, 수도권 어느 곳에도 정세균의 확고한 기반은 잘 보이지 않고 이념적으로도 중도는 손학규, 진보는 정동영과 천정배 등이 포진하고 있으며 정세균의 스탠스는 조금 어정쩡해 보인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당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구원투수의 역할을 담당했듯이 어떤 상황도 냉정, 침착하게 대처하고 어디에도 뚜렷한 비토세력이 없으며 전국적으로 고른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등의 강점을 지녔다고도 볼 수 있다.

결국 2011년이 가기 전에 당원과 국민들 속에 얼마나 깊숙이 자리 잡느냐는 것이 정세균이 어릴 때부터 가졌다고 하는 ‘꿈’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인지를 판가름할 고비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정세균 최고위원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성실함이 돋보이고 주위 사람을 배려하고 자신을 낮추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다. 그러나 지금부터 가야할 길은 그것만으로 안 되고 오히려 자신을 적극 드러내고 무언가를 저지르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다. 정세균의 변화, 어디까지 가능하고 그러한 변화를 통해 평천하의 길을 열어나가는지를 지켜볼 대목이다.


- 이명식 편집주간 기자 (lms9507@polinews.co.kr) 
 

원문링크 : http://polinews.co.kr/viewnews.html?PageKey=0101&num=130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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